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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Seoul



miaan   10/01/12 17:57  
*
난 요즘 며칠 전 부러진 뼈 주변이 너무 아파서 미다졸람Midazolam의 힘을 빌어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미다졸람은 벤조디아제핀Benzodiazepine 계열의 수면유도제인데 많이 먹으면 다른 약들처럼 위험하겠지만 정량을 잘 지키면 편안하게 잠을 재워주는 아주 고마운 약이죠. 벤조디아제핀계 약물이 시판되기까지엔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많았어도 지금은 장소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약물입니다. 부작용도 상대적으로 없는 편이고요. 병원에서 마취할 땐 프로포폴Propofol 등을 병용하지만 그냥 밤에 자려고 그렇게까지 하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닐 것 같군요.


어젯밤도, 자정을 조금 넘은 시각에, 나는 평소와 같이 미다졸람을 먹고 약효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루한 돈 얘기 밖에 없는 지루한 잡지를 펼쳐 들고 누워 있었어요. 그러다가 누가 말을 걸었고, 나는 상상도, 정말 상상도 못 하고 있었던 청천벽력같은 소릴 들었고 아주 크게 절망했습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었을 정도였어요. 알래스카의 산에서 아무 생각 없이 뛰다가 저산소증으로 빨라진 박동 따위에 비견할 바가 아니었죠. 난 그냥, 사실상 편히 사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되는 thoracolumbar의 반응 기전과 셰익스피어가 생각났고 난방이 형편없는 내 방에서 손발이 차가워지고 가슴이 너무 아파서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부러진 뼈가 전혀 아프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좌절감과 상실감은 처음이었습니다.


어쨌든 나는 짧은 전쟁과도 같은 과정을 통해, 일단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시계는 오전 다섯 시 오십 칠 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수면유도제를 먹고 잠이 확 깬 와중에 미친듯이 뛰어댄 심장으로 내 머릿속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메시지를 확인하려고 전화기의 비밀번호를 누르려고 했지만 별로 길지도 않은 비밀번호를 다섯 번 틀리자 전화기는 한 시간 뒤에나 다시 시도해 보라며 키패드를 잠궈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보고 있으면 가슴이 찌릿찌릿해진다는 사진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몇 시인지 알 수 없는 시각에 잠들었습니다. 찌릿찌릿 사진은 찌릿찌릿보다는 어딘가 슬픈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다시 이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다시 와이셔츠를 입고 구두끈을 묶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의 방에 있는 나는 대단히 무력했습니다.


참고로 위의 사진과 찌릿찌릿 사진은 하등의 관계가 .. 음, 없는 것 같네요.


   10/01/13 07:01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miaan   10/01/13 14:21  
/비밀 덧글 남겨주신 ******님.
네, 물론 전 살아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신변을 비관해 자살하거나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의 수가 증가추세에 있는 것 같지만 전 일단 자살은 안 하겠다는, 다소 불공정해 보이는 계약을 하기도 했고 사고 등으로 죽기엔 전 지나치게 운이 좋은 것 같아요. 며칠 전 얼음판에 미끄러졌을 때도 전 생명 유지와는 크게 관계없는 뼈가 하나(혹은 둘) 부러졌고 결국 살아남았습니다.


한국에 오셨단 말씀을 듣자니 어디 멀리 다녀오셨나봐요. 지난번 편지에선 그런 기색을 안 하셔서 전 한국에 계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어쨌든 한국을 벗어날 수 있으셨다는 건 좋은 이야기입니다. 전 집에 누워나 있으라는 몇몇 의사들의 말에 귀기울여 집에서 누워나 있어요. 며칠째 집에만 있자니 정말 답답하고 힘이 듭니다. 서울은 오늘 또 몇 년 만의 한파가 어쩌고 하지만 제 방 창문 밖으로 보이는 길거리는 시원하고 밝아 보이는군요. 원래대로라면 제가 지금 오랜만에 얻은 휴가로 양곤ရန္‌ကုန္‌의 한 카페에서 여유롭게 책이나 읽으면서 놀고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하니 답답한 마음만 쌓입니다.


제가 겪은 절망은 사실 한 단어로 응축하기엔 관계된 요인들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또 제가 가지고 있는 단어장에는 이런 종류의 절망을 표현할 수 있는 용어가 없는 것 같고요. 설명하려면 대학에서 가장 큰 강의실에 있는 칠판과 사 박 오 일의 시간과 여섯 명의 대학원생을 필요로 합니다. 추측하신 그것도, 아마, 비슷한 정도의 좌절감과 상실감을 가져올 것 같기는 한데 그런 일을 겪으려면 여러 가지 선결 조건이 필요하고 전 그 선결 조건을 만족시키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서 .. 하하. 하지만 어쨌든 관심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님과 만나게 된지도 벌써 삼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군요. 세월이 빠르긴 참 빨라요. 삼 년 전만 해도 전 좀 한가했었고 지금의 일과는 자못 다른 일들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옛날이 좋았다는 한심한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버린 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장의 상황에서 최선을 찾는 게 늘 제일 좋은 방법이죠. 전 와병 생활 중에 읽을 책을 몇 권 더 주문하려고 합니다. 주신 새해 복은 잘 받도록 하겠습니다. ******님께도 좋은 일들과 행운이 많은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cooq   10/01/30 17:59  
이 사진....
어어부   10/02/23 13:33  
저 시계는....혹시 파텍필립?;;
대체 미안님의 정체는........
nike   10/07/22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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