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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의 주택가에 있는 평범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얼마 전 그 근처를 지나다 본 바에 의하면 아직도 그 자리에 쓸 데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좀 없어져도 되는데. 어쨌든 내가 다녔던 학교의 교복은 재킷과 팬츠, 베스트(나는 고등학교에 재학하는 3년간 한 번도 이 베스트를 입어 본 적이 없습니다)와 드레스 셔츠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넥타이를 맸지요. 여학생들의 경우에는 재킷과 베스트,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고 넥타이를 매게 되어 있었어요. 우리가 입던 셔츠와 블라우스는 모두 무늬가 없는 하얀 색이었습니다. 나는 하얀 셔츠를 꽤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하얀 셔츠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근데 생각해 보니 하얀 셔츠 뿐 아니라 많은 셔츠들에겐 이런 단점이 있겠군요:


고등학교에 다니다 보면 먹을 것들이 옷에 떨어지기도 하고, 바닥에 넘어져 나뒹굴어야 할 일도 있고, 피를 흘리거나 남의 피를 묻히게 될 일도 있잖아요.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하얀 셔츠는 이런 stain들에 아주 취약합니다. 특히 blood stain의 경우에는 학교에서 피를 묻히고 방과 후 집에 도착할 때 쯤이면 갈색으로 완전히 굳어 버려서 chloride 표백제를 써도 제대로 지워지지가 않는데다 표백제를 쓰고 나면 와이셔츠 천도 상하고 collar와 cuffs 안에 든 심지도 상해 못 입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못 쓰게 된 옷이야 버리거나 오려서 reform하면 된다고 하지만 나는 피나 홀바인 잉크, 혹은 테리야키 소스가 묻은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게 정말 싫었습니다(아시잖아요 여러분, 나는 mysophobia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건: 아주 깨끗하게 세탁된 셔츠를 학교에 가져다 두는 거였습니다. 나는 사물함에 포장을 뜯지 않은 새 셔츠를 두 벌 가져다 놓아 봤습니다만 새 셔츠 특유의 접힌 자국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사실 나는 맞춤 셔츠를 입었기 때문에 내 새 셔츠들은 처음부터 접혀 있지는 않았지만, 셔츠를 접지 않고서는 학교 사물함에 넣을 수 없었습니다). 학교 사물함의 좋지 않은 냄새도 스며든 것 같았습니다. 좀 짜증이 난 나는 그 셔츠 두 벌을 들고 학교 앞의 세탁소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세탁소 아저씨에게 세탁비를 조금 더 내거나 따로 보관료를 내도 좋으니 내 셔츠를 빨아서 내가 찾으러 올 때 까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맡아 가지고 있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셔츠는 자리도 차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저씨는 흔쾌히 허락했고 나는 학교는 아니지만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깨끗한 셔츠를 가져다 둘 수 있었습니다.


내가 대학을 떠나고, 그리고 그 한참 전에 고등학교를 떠날 때 나는 그 세탁소의 일에 관해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내 셔츠들에 관해서도요. 사실 그냥 집에 갈 시간을 3분만 늦추면 찾아 갈 수 있었을텐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손가락을 꼽아 셈하지 않으면 알지 못할 만큼의 시간이 흘러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근처에 갈 일이 생겨 세탁소 아저씨는 잘 있나 궁금하기도 했고 내 셔츠도 찾아갈 겸 세탁소가 있던 자리로 발을 향했습니다. 그렇지만 세탁소가 있던 건물은 이미 헐리고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대신에 이상한 게 들어서 있더군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세탁소와 내 셔츠의 행방에 관해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는 내가 내 셔츠들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내 셔츠들은 버려졌을지도, 노숙자가 입고 있을지도 모르고, 콩고의 캠프에 있는 난민이 부러진 팔에 부목을 대는 데 찢어 썼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쨌든 나는 내 셔츠들이 답답한 지하 세탁소에 있기 지겨워 여행을 떠난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꽤 긴 여정일 거에요. 내 셔츠들과, 다시는 가지 않을 그 동네에 놓고 온 것들의 행운을 바랍니다. 그들에겐 mysophobia도 없으니 내가 주인이 아닌 이상에야 다소 더러워지더라도 아마 신경쓰지 않을 겁니다 :-)



weed   07/03/19 18:42  
아직도 그 자리에 쓸 데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좀 없어져도 되는데. -> 이 부분에서 한참 웃었습니다. 네, 사실 저도 제가 졸업한 고등학교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 하긴, 저는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고등학교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은..... 고등학교가 은근히 옷에 피 뭍힐 일이 많은 곳이지요 :(
Tumnaselda   07/03/19 20:45  
음식이나 먼지 흙까지는 아무래도 이해가 됩니다만 피는...orz
gming   07/03/20 09:53  
miaan님의 글은 재밌어요. 문체도 재밌어요. 그래서 그럴까요. 왠지 이 곳에 들르는 분들은 모두 (이곳에서는) 비슷한 느낌이 되버립니다. :-)
pooh1   07/03/20 11:31  
역시 친구라서 통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
슬슬, 죠 샌드위치의 베이글이 지루해 져서. 거기서 쓰는 크림치즈 베이글이 입에 살짝 안맞기도 하고....
빵의 크기도 마음에 안들어. 커피빈 베이글이 제일 마음에 드는데, 너무 멀어. 우리 건물에도 커피빈이 있었으면 좋겠어 스타벅스 대신에.
ㅎㅎ 예전엔 있었는데-ㅋ 오늘은 지루한 날이네. 저녁에 학원까지 가야 하니 벌써 부터 피곤해....
너도 지루해 하고 있는데, 우리 뭐 신나는일 없을까?
...   07/03/20 13:06  
나는 졸립니다
   07/03/20 17:52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rudeness   07/03/21 13:42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나네요. ^^ 이상한게 참 많아졌어요 그 근처엔...
어쨌거나 반가웠습니다. 1000cc잔을 들고 마시는 맥주도 좋았어요.
miaan   07/03/24 03:48  
/weed님.
본문에는 쓸 데가 없다고 적었지만, 전 그래도 한국의 (거의 모든)학교들이 어떤 면에서는 쓸모가 있다고 생각해요. 여행광을 자처하며 지구의 부평초 신세를 마다않는 저로서도 아직 한국의 (거의 모든)학교들만큼 폭력을 비롯, '온갖 좋지 않은 것들'에 관해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거의 모든)학교들에서 접할 수 있는 제도적인, 혹은 교원들의, 그리고 학생간의 폭력은 정말 수준이 높습니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이런 환경이 행운일지 비운일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습니다만, 어떤 학생들은 그런 환경에서 더욱 억세고 담대하게 자라나는 모양입니다. 예, 비아냥입니다 :-)
miaan   07/03/24 03:51  
/Tumnaselda님.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전 셔츠에 음식보다 피를 더 많이 묻혔답니다. 역시 제가 음식물을 잘 흘리지 않기 때문이겠죠? :-)
miaan   07/03/24 03:54  
/gming님.
제 블로그에 들러주시는 분들로부터 비슷한 말씀을 몇 번 들은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블로그에 달아주시는 여러분의 덧글에서도 diversity를 느끼며 즐거워해요. gming님께서 여기에 달아주시는 덧글에는 gming님의 느낌이 강하게 남아있거든요. 언젠가 친구에게 부탁해 '눈 가리고 덧글 작성자 가려내기'라도 한 번 해 볼까 합니다 :-)
miaan   07/03/24 04:03  
/pooh1님.
네 회사 건물에 CBTL이 입점한다면 네게도, 내게도 좋은 일일 겁니다. 아마 우린 좀 덜 지루해 할 수 있겠죠- 근데 네 회사 건물에 입점한 Starbucks에 나는 한 번인가 두 번 정도 밖엔 가 본 적이 없지만 의외로 장사가 꽤 잘 되는 것 같더군요.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접근성이 좋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늘 만석을 유지하는건지 이유를 잘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장사가 잘 되는 이상 CBTL로 대치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걸어서 6분 거리에 큼지막한 CBTL이 있잖아요. 하긴, 그러고보면 거기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그게 Starbucks든 CBTL이든 Segafredo든 별로 관심이 없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


그러고보니 CBTL의 베이글도 좋지만, Segafredo의 panini도 먹을만 하잖아요? 좀 비싸긴 해도.
miaan   07/03/24 04:05  
/...님.
갈 :-0
miaan   07/03/24 04:10  
/비밀 덧글 남겨 주신 e**님.
난 가끔 KTX가 e**님의 지갑을 털어 재정을 충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어쨌든 아니라는 걸 아니까 괜찮습니다. e**님이 말씀하신 그 시각에 원래대로라면 난 일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만, 먼 걸음을 하는 내 친구를 위해 서울역에 나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커피점에 자리를 잡고 또 놀아 보도록 합시다. 구멍 다 뚫린 CBTL 포인트 카드도 엄청나게 많이 모아 두었답니다 :-)
miaan   07/03/24 04:13  
/rudeness님.
rudeness님의 소개로 간 그 맥주가게는 정말 좋더군요. 비록 맥주 맛은 그저 그랬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단어가 복수의 의미를 지닌다는 걸 잊지 맙시다)과 조용한 곳에서 언성을 높이지 않고 놀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근데 그 MCM 열쇠 지갑을 부록으로 주는 잡지는 지난 달 잡지로, 이젠 품절이더군요. 열쇠 지갑을 찾는 친구가 있어 소개했다 낭패를 보았답니다.
roy   07/03/26 08:42  
아주 우연히 접하게 된 블로그입니다. 웬지 문체가...끌리는데요..?;
뭐랄까...일본소설을 번역해놓은 느낌이랄까..;;
여튼 신선한 문체입니다... 글 재밌게 읽고갑니다. 꾸벅~
miaan   07/03/26 13:45  
/roy님.
제게도 文體라는 게 있다는 것이 놀랍고, 있다면 그 졸렬할 문체를 마음에 들어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방문과 말씀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
gming   07/03/26 22:29  
재미있는 놀이일거 같아요. 'ㅁ'/ 친구분들도 재밋으신 분들이군요
miaan   07/03/29 22:54  
/gming님.
그 놀이를 해 보려고 했는데 .. 전 이 블로그에 있는 거의 모든 덧글을 다 외우고 있더군요. 나중에 뭔가 제가 보지 않은 새 덧글이 와장창 달리면 그때 해 볼까 합니다 :-)
세탁소집 아들   08/05/05 19:10  
세탁소가 이사가거나 망하면 그 동네의 가까운 세탁소로 옷을 넘김니다
다른 사람들이 찾아갈수 있도록요ㅎ
물론 가게 문닫기전까지 어느 세탁소로 찾아가라고 써두지요
그냥 지나가다가 써봅니다.ㅎ
miaan   09/02/07 00:25  
/세탁소집아드님.
슬프게도 전 그 세탁소가 있던 건물이 헐어지기까지 그 세탁소 근처에 갈 일이 없었고 그 근방의 세탁소들이 모두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 또 그 아까운 셔츠들 생각이 나는군요. 하지만 그때 입던 셔츠들은 이제 맞지 않아 입을 수 없을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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